본문 바로가기
생활속의 역사

대만의 군함 건조기술이 허접해진 이유

by 맹글맹글 2023. 10. 25.

 

안녕하세요~맹글이 입니다
오늘은 대만의 군함 건조기술이 허접해진 이유와 그 시작이 된 사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화민국(타이완,대만)의 국기
중화민국(타이완,대만)의 국기-파랑,빨강,하양의 세가지색은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을 나타낸다

 

목차

1. 1970년대 대만의 상황(국제정세)

2. 대만의 신규 호위함 도입사업

3. 대만의 지식인들의 한국 함정도입 반대이유

4. 최악의 함정도입 변경

5. 대만을 뒤흔든 뇌물수수 사건

6. 이후의 결과


1. 1970년대 대만의 상황(국제정세)

1971년 유엔(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여 번영을 이루기 위한 국제기구)은 
찬성 76표,반대 35표라는 압도적인 표차를 통해 중화민국(대만)을
축출시키고 중국 공산당을 가입시킵니다

 

유엔상징
유엔


유엔 탈퇴와 동시에 대만과 수교 중이던 나라 중 절반이 대만과의 단교를 선언하며
13억 시장을 가진 중국과의 외교를 수립하게 됩니다
1972년에는 일본이,뒤이어 네덜란드, 독일, 멕시코, 스페인, 베트남에 이어 미국까지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하게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대만의 수교국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부분 국가들이 대만을 버렸으며 미국만이 대만관계법을
통해 간신히 관계를 이어가게 있었습니다

그와중에도 끝까지 대만을 버리지 않고 중국과의 수교를 거부하며 대만과의 관계를
이어오던 나라가 있었는데...
바로 대한민국이었습니다

 


2. 대만의 신규 호위함 도입사업

대만은 1980년대 10년간의 장기해군 건설계획인 광화 2호 계획을
수립하면서 1,500톤급 호위함 16척을 조달하는 내용을 담아 미국,
한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에 제안서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한국군이 운용 중이던 울산급 호위함을 선택하게 됩니다 
한국은 대만과의 우호관계를 들어 저렴한 가격외에
향후 10척을 대만측이 건조하는 데 있어 현대 측이 설계도와 건조기술을 제공해
준다는 최상급 조건도 포함시켜 주었습니다
실제로 한국 해군이 대만에 방문하면서 대만의 신형 호위함 도입사업은 성사 직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의 울산급 호위함-경북함
한국의 울산급 호위함-경북함


하지만 대만정부가 한국으로부터 6척의 프리깃함을 구입하기로 한 결정이 알려지자 
대만의 정계와 언론,그리고 전 국민까지도 한국산 함정 도입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중공업과 
기술 향상에 떨어져 있음을 입증하는것이다라는 자존심을 자극하는 국민감정 문제로 간주하며 
크게 격분,극렬한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결국 성사직전 한국과의 호위함 계약은 파기되게 됩니다


3. 대만의 지식인들의 한국 함정도입 반대이유

대만의 지식인들은 현대중공업의 울산급은 헬리콥터가 이착륙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갑판이 좁고 
함포들의 화력이 낮아 중국함정을 격퇴시키는데 부적절한 낡은 모델이라며 함정의 질이 떨어진다고
말도 안되는 억지 주장을 하게 됩니다

 


4. 최악의 함정도입 변경

여론은 이스라엘 또는 독일의 베스트셀러 호위함인 MEKO200등의 최신식 함정을 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첫 도입 이후에는 서구 국가들의 설계도와 건조기술을 도입, 대만 내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대안마저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대만과 단교한 상태였으며,미 해군은 1500톤급 군함이 없었기에 프랑스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대대적으로 무기수출 판촉에 나서고 있던 프랑스는 1989년 대만의 관계자들과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라파예트급 호위함을 인도받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라파예트급 프리깃함
프랑스의 라파예트급 프리깃함


하지만 이 선택은 이후 수많은 문제를 낳게 됩니다

우선 원래 라파예트급 6척의 건조비용은 1989년에는 70억 프랑이 제시되었는데 불과 2년 후인 
1991년에 계약할 때의 가격은 160억 프랑으로 두배이상 수직 상승하게 됩니다

따라서 대만 정부의 기본 광화 2호 계획은 저렴한 로우급 8~16척 도입이 목표였지만
결국 예산 문제로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보다도 적은 6척만을 도입하는 것으로 결정이 됩니다

이때 아쉬움을 느낀 프랑스는 이후 약간 저렴하게 한 4척 추가 도입의 옵션을 내놓았지만
그래도 대만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가격과 함께 대만 정국을 흔든 뇌물수수 등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추가도입은 백지화 됩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은근한 중국의 압박으로 인해 프랑스는 결국 무장에 대한 계약을 철회하는 입장이
되면서 프랑스제 무기를 장착하지 못한 즉, 무장이 없는 상태(무기 없는 깡통배)로 대만해군은 
껍데기만 있는 라파예트급 호위함을 인도받게 되자 대만언론은 계약을 취소하고 
위약금을 물게해야 한다고 연일 떠들어대면서 국제사회에 호소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도 대만의 이 같은 호소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대만은 
그제야 한국산 호위함을 도입했어야 했다는 일부 사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만은 노심초사한 끝에 미국에 사정하면서 미국산 무기를 도입해 무장 통합을 했지만
프랑스제 전자 장비들과 미국제 무기들이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고,
통합으로 인해 지불된 금액 역시 호위함 1척 가격에 해당된 비용이었습니다

돈은 돈대로 쏟아 부었지만 대만해군의 다른 함선에 비교해 가동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는 6척 모두가 항구에 머무는 사태가 수시로 발생하면서 전력화에 허점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9월 1일 기술이전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건조기술이 부족하자 대만해군은 
2023년 말부터 4년간 건조할 예정이던 소형 이지스함급인 4,500톤급 미사일 호위함 건조를 포기하고 
대안으로 2,200톤급 경량급 호위함인 원형함만 2척 건조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었습니다


5. 대만을 뒤흔든 뇌물수수 사건

대만을 뒤흔든 뇌물수수 사건은 1993년 12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라파예트급 도입에 대한 비리를 고발하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있던 무기 획득실의
인칭펑 상교(대령급)가 피살되면서 의혹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군당국의 수사는 군내의 비호세력과 정부의 압력으로
지지부진하게 루머만 돌뿐 진전이 없었지만,2000년 천수이볜이 집권하면서
도입비 160억 프랑에서 뇌물로만 35억프랑이 군과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간 경악할만한
비리의 규모가 드러났지만 2010년에 증거 불충분으로 6명 모두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비리의 몸체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이후 뇌물등의 스캔들에 의해 해군 정책 결정권자들이 대거 물러나는 등
뒤숭숭한 속에 건함 사업은 졸속으로 추진되게 됩니다

 


6. 이후의 결과

한국과의 호위함 사업이 백지화되고 정치적으로는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한국과의 대사급 외교관계에 막타를
스스로 쳐버린 결과는 한국과의 단교가 가속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1992년 한국은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를 맺게 됩니다

또한 이 여파로 추후 군함 건조 계획들이 정지되었고, 건함 관련 기술진들도 사라져 버리면서
연구개발 통합 및 프로젝트 관리를 수행할 동력이 소멸 됐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만약 대만이 한국과 계약을 해서 전함건조 기술을 받았다면 대만은 자체적으로 군함을 건조할 수 있는 기술과 함께
지금쯤은 동아시아에서 해양강국이 될수 있었을 것입니다